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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현장’이 아니라, 월요일 ‘일터’에서 이뤄지는 ‘소명’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는 정신적인 작용이나 체험적 고백이 아닙니다. 믿음은 삶이며, 삶은 곧 믿음의 존재방식입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소명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명령을 일상에서 순종,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동행했던 믿음의 사람들은 특별한 제의나 행사를 '동행'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주어진 일상 속에서 주신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동행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일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일터입니다.

오늘은 일상을 살아가는 두 권의 책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 권은 우병선 목사님의 <생계를 넘어 소명>이고, 다른 한 권은 치과의사인 이철규의 <오늘을 그날처럼>입니다. 한 사람은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일터로 나간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신학을 했지만 목회자가 아닌 일반 직업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다른 듯 닮아있고, 닮은 듯 다릅니다.

이제 택시기사를 하거나 밤에 대리운전을 하는 목회자들을 흔히 만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목사의 이중직을 허용해야 하느냐 마느냐로 논란이 되고 있지만, 현실은 이미 목사도 목회가 아닌 일터에서 '소명'을 이루어가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직업이 무엇인지 다시 고민해야 할 때가 된 것이 분명합니다. 종교개혁 시대 직업은 'Calling(소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목회자 홍수시대, 또는 생계를 위해 불가피하게 직업을 가져야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업을 갖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제 두 권의 책을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직업과 소명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생계를 넘어 소명

-존재가 소명이다. 이 책의 저자는 목사입니다. 목사는 목사로서 '소명'을 받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김형국 목사는 추천사에서 '성과 속을 나누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교회라는 건물의 영역 안에 가두고 버리고, 소명은 목회자만 받는다는 사제주의에 빠져 중세 교회로 퇴화해 버린 우리 상황'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 속에는 중요한 기독교적 세계관이 담겨있습니다. 목회자만 소명을 받고, 일반 신자들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이원론적 왜곡된 세계관이 담겨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위대함은 성과 속으로 구분되어 오직 사제들과 교회에 관련된 것만 성으로만 제한시킨 것은 모든 세계와 일상을 거룩한 것으로 환원(還元) 시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명은 목회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 살아있는 모든 존재(存在)에 주어집니다. 우리는 존재가 곧 소명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일을 해야 하고, 뭔가를 이루어 내야 하는 효율적 존재, 아니면 적어도 생산적인 사람들에게만 '소명'이라는 고상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음을 말합니다. 소명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주어집니다. 존재가 소명이니까요.

-목사라는 직업 그리고 소명

그럼 우리는 여기서 조금 난해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목사로 부름을 받았는데, 어떤 이유로든 목사직을 내려놓고 일반 직장을 다닐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을 품는 것이 먼저이지, 목사가 되어서 소명을 품는 것이 아니다. ... 소명의 본업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직이 무엇인지 고민하다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목사의 직을 선택하는 것이다. 목사라는 직책보다 목사라는 직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소명의 본업을 이루려는 그것이 정수다(74쪽)."

저자는 여기서 목사라는 직책보다 '소명'이 먼저라고 답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있고, 목사는 그 소명을 이루는 하나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는 소명을 이루는 사람이지, 목사직 자체가 소명은 아닙니다.

목사만 소명이라는 공식을 대입시킨다면, 목사직을 내려놓고 다른 직업을 선택하거나 일반 직장인들은 소명자가 아닙니다. 이 말속에는 성속을 구분했던 중세의 왜곡된 가치관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소명은 목사보다 앞섭니다.

▲‘생계를 넘어 소명’의 저자 우병선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2. 오늘을 그날처럼

'어느 치과의사의 일터 신앙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현재 치과의사로 살아가는 이철규의 일상 이야기입니다. 우병선 목사의 책이 약간 신학적 주제에 가깝다면, 이 책은 실제로 직업 현장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일기와 에세이 형식을 빌려와 고백합니다.

우병선 목사가 목회에서 일터로 나갔다면, 이철규 의사는 일터에서 신학을, 신학에서 다시 일터로 회귀(回歸) 했습니다. 동일하게 신학의 과정을 거쳤지만 사뭇 다른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이철규 의사는 소명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백석대 류호준 교수는 이 책을 '의사이며 신학을 전공한 저자가 교회와 일터, 신앙과 삶, 일요일의 하나님과 월요일의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좁혀가려 부단히 수고하며 흘린 땀방울들의 결정체'라고 소개합니다.

이 책은 일관성 있는 논문이 아니라 병원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에피소드와 저자의 개인적인 소견을 담담하게 그려낸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계적인 의견 개진보다 직장이란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저자의 개인적 생각들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3장까지는 자신의 간증과 병원의 일상을 담았습니다. 4장에서는 서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책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

-소명은 스토리다.

성경은 계시입니다. 계시는 오래된 것이며, 늘 새로운 것입니다. 계시는 시대와 시간 속에서 현재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이자,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명의 일터이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여는 글 서두의 문장은 그대로 새겨놓을 만큼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소망은 현재를 지탱하는 축이다. 애석하게도 우리의 신앙은 과거와 미래를 놓쳤다. 성도는 스토리를 망각했고, 교회는 스토리를 재해석하는 큰 스토리를 잃어버렸다. 그 결과 우리들은 교회에서는 십자가에서 출발하여 새 창조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상상력이 사라졌다(14쪽)."

저자는 개인의 일상이 하나님의 큰 스토리 안에 머물고 있다고 말합니다. 소위 불신 가정에서 태어난 저자는 대학 시절 불교에 흠뻑 빠져 지냅니다. 당시 저자는 기독교가 제시하는 구원의 은혜를 '무책임한 종교적 환상'으로 여깁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내를 만나 기독교를 접했고, 둘째가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급한 부르심을 직감합니다. 그렇게 저자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지요. 하나님을 만난 저자는 자신의 직업을 재해석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니 그동안 관행처럼, 아니 일상처럼 해왔던 많은 치료의 방법들은 그릇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소명은 삶과 일상을 재해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큰 스토리 안에서 '자기만의 스토리'(19쪽)를 살아갑니다. 1장 '진료실에서 만난 하나님'은 직업 속에서 만들어가는 자기만의 스토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노트 안에서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작가입니다.

-소명은 영적 전쟁터다.

소명의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와 확장'일 것입니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은 번성하고, 확장시키며, 다스리라는 소명을 주십니다. 번성과 확장, 그리고 통치는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키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일터는 소명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저항하는 모든 악의 세력과 죄악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굴복시키는 삶이 '소명'입니다.

"일상이란 어떤 곳일까? 신앙인에게 일상은 신앙과 삶이 부딪히는 현장이다. 신앙인의 일상은 전투현장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넓어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는 곳이다. 신앙인은 전투원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사탄을 물리치는 역할을 감당하기도 한다. 일상에서 신앙이 구현되어 그 진가를 발휘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실패하여 좌절할 수도 있다(138쪽)."

불의한 방법으로 치료하는 것, 고객과 사원을 속이는 행위들은 저항하고 싸워야 할 악의 세력입니다. 개업의라면 특히 돈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편법을 쓰고 과잉진료 등을 통해 수입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소명자와 이득을 생각하는 사람이 갈라집니다.

'전문직 윤리'(121쪽)이라는 글에서 책임 있는 의사의 판단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판단의 전문성', 둘째는 '판단의 독립성', 셋째는 '판단의 책임성'이 그것입니다. 의사는 전문가입니다. 고객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사에게 진료를 의뢰합니다. 의사는 고객의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의사는 자신의 진료와 치료의 과정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의사로서의 사명은 공짜가 아닙니다. 정직과 손해라는 불가피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터가 소명의 현장인 일터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가면서

그리스도인은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소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일요일의 하나님'만 섬기지 않습니다. 거룩한 종교적 행위는 있으나 직장에서 편법과 불법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는 소명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요일의 하나님'뿐 아니라 '월요일의 하나님'도 섬겨야 합니다. 일요일의 하나님과 월요일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닙니다. 일요일도 하나님의 날이고, 월요일, 화요일, 모든 요일이 모두 하나님의 날입니다.

칼빈은 이것을 '소명'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우병선 목사는 찰스 쉘던의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책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우리를 사용하시는 삶의 영역에 제한 구역은 없다(239쪽)'고 선언합니다.

소명은 특정한 누군가에게 제한된 은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소명자입니다. 소명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지한 자로서 세상을 해석하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소명은 어느 한 부분에 한정된 것도 아니고, 일정한 방법만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소명이고, 존재가 곧 소명입니다. 이제 마치려 합니다. 이철규 의사의 강의를 들은 어떤 수강생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 그럼 종말은 END가 아니라 AND군요.!"

그렇습니다. 소명은 일요일의 예배 현장이 아니라,

월요일의 일터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배는 끝이 아니라 당연히 '그리고'라는 연장인 것이죠. 감사합니다.

정현욱 목사(서평가)

출처: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2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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